Hyunmo Yang 양현모 梁 賢 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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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2025)
한 단어가 비틀거리며 도망쳤다. 단어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 줄 모르면서도 쫓기듯 달렸다. 단어가 달려가는 길에는 연필로 그어진 줄들이 이어져 있었다. 연필로 그어진 줄은 잠시 흐릿해졌다가도 원형의 형태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단어는 잠시 원 옆에서 숨을 골랐다. 원은 푹신푹신했고 그런 형태가 반복되는 것은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아마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이응’을 품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이윽고 단어가 숨을 고르며 도착한 곳은 줄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종이의 끝이었다.
“저를 잡아 주세요. 저는 다신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단어가 나달거리는 종이 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소리쳤지만, 그를 도와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종이를 나올 수밖에 없는 건 그의 숙명이었다.
이후 단어가 하는 모든 말들은 거짓이 되었다. 실로 거짓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거짓처럼 여겨졌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가 밖으로 나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수녀였다. 수녀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목도리와 털모자를 꺼내자 죄책감들이 따라 나왔다. 죄책감은 잘게 으깨진 부스러기가 되어 가방 속 목도리와 장갑에, 필통의 자크 틈에, 필통 속 연필과 색연필에, 지갑에 붙어있었다. 수녀는 마치 증거물을 수집하는 형사처럼 부스러기가 묻은 물건들을 성물대 위에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나도 이것들을 모두 끌어안고 살아요.”
수녀가 말했다. 단어는 수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수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스러기가 된 죄책감들을 한 데 모았지만, 잡으려 하면 할수록 그것을 모으는 일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흘러내린 부스러기는 모래가 되어 사막을 만들었다. 해가 내리쬐는 사막에는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두 여자가 보였다. 두 여자가 동시에 손차양을 만들었고, 단어는 그 도식적인 행동에 현기증이 났다. 여자들은 봉황의 눈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이 불었고 삼엽의 잎사귀가 흔들렸다. 지구 반대편에는 이상기온이 이어졌기 때문에 잎사귀는 더 이상 삼엽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엽이 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모래가 날아와 단어의 구석구석으로 들어왔다. 단어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스스로를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단어는 자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며 비칠댔다. 그에게서는 흙냄새가, 아니 마른가루 냄새가 났다. 그는 기꺼이 그 냄새를 풍겼다. 그로써 그는 조금 홀가분해졌고 그보다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분명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나, 정작 그는 멸시받는다고 느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 소설은 내 최근 작업 흐름인 '오독의 층위(2024-2025)'와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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